꽃잎 한 장, 나뭇잎 한 장 떨어지는 것에도 가슴이 텁텁해지는 날들이 있었다. 내가 앓고 있는 마음이,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이 세상의 전부인 것 마냥 온통 주변이 나에 관한 이유들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그 때 내가 썼던 글들, 그 때 내가 환호했던 음악들, 그 때 내가 경외했던 사람들 모두, 지금 돌아보면 치기어린 기억들일 뿐이다. 유치한 감정들을 토해냈던 글들도 그 당시에는 스스로에게 솔직한 것이라며 마침표를 찍으며 뿌듯해 했을 것이다. 남들이 듣지도, 시도하지도 않는 음악들을 들으며 남들과 다르다는 자부심 따위로 숱한 열등감들을 숨기려고도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 좀처럼 따라잡기 힘든 박자를 힘겹게 따라가며 듣고 또 듣는 일을, 수학의 정석을 읽고 또 읽는 것처럼 반복해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지금은 여기에 살아 있지 않지만, 그래서 그 죽음의 아우라로 내가 경외해 마지않았던 이들 또한 지금 돌아보면 치기어린 어느 날들의 부끄러운 흔적일 뿐이다. 나의 과거는 이렇게 부끄럽고, 후회스럽고, 유치했다.
지금 나는 좀 더 세련되고 솔직한 글을 쓰고, 내 달팽이관이 허락할만한 조용한 노래들을 듣고, 소박하지만 아직 살아서 만나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가끔 예전에 썼던 글, 예전에 즐겨들었던 음악, 예전에 존경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그 때는 참 어렸던 것 같아’ 하며 지금은 좀 더 성숙한 나를 다독이기도 한다. 성장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결국 어제를 밟고 오늘로 올라서는 과정, 과거를 덮고 현재를 덧씌우는 과정이다. 부끄러웠던 모습들을 지우기 위해 발버둥 치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 이상 그것들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을 때 비로소 불어난 몸집만큼이나 성장한 것이라 여겨질 만해진다. 그리고 아마 시간이 좀 더 난 어느 날엔가 또 지금처럼 과거를 톺아보며 후회하면서 그 흔적들을 덮으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 부끄럽지 않고, 유치하지 않은 오늘의 나와 내 주변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된다. 나는 성장의 과정을 버리고 지워가며 성장한다. 나를 속이고 또 속이는 일들의 연속, 끝나지 않는 시시포스의 형벌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말 그대로 스스로를 속이고 덮어가는 과정일 뿐 여전히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 한 구석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반추되고 끊임없이 기억되면서 나를 괴롭히는 기억들.
수년 전 어느 날 내가 했던 말, 내가 가졌던 감정, 내가 좋아했던 무엇이 지금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미래의 어느 날엔가 그저 부끄러운 흔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5년 전의 나는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며 상처받고, 그 상처를 끊임없이 파고 들어가며 스스로를 헤치고는 했다. 그리고 무모해 보이는 꿈을 위해 가혹하게 나를 옭아매어 가며 무의미한 문제지 풀이를 계속해야만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힘들어 했고, 온갖 열등감들을 이겨내기 위해 분주한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그 5년 전의 답답했던 날들이 내 인생에서는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이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지금의 기억들이 그 순간에는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연애는 어렵고 서툴렀지만 그래서 더 좋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수능 공부도 지루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부끄러워하며 지우고 덮어버리기에는 아쉬운, 그리고 미안한 기억들인 것이다.
지금 내가 써내려 가는 글을 어느 날 다시 돌아보게 된다면 오글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얼얼른 창을 닫아버릴지도 모른다. 한번 쿨해져 보자고 허세부리는 모습에 얼굴이 달아오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들이 왜 고민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살아가기 위해 유치한 몸부림을 작렬하고 있다. 아마 오늘이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인생에서 가장 눈부셨던 순간, 화양연화가 될 거라고, 믿으면서.
“내비둬, 지들 좋아서 그러는 건데 뭐. 다 지들이 좋아서 아프고 괴롭고 그러는 거지”
-<커피프린스 1호점>, 홍사장님 말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