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신문 기고문에서 지면이 부족해 빠진 부분을 추가했습니다.

---------------------------------------------------------------------------------------------------


마지막 수업

색이 바랜 청바지, 다리지 않아 쭈글쭈글한 셔츠,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한쪽 어깨에 걸친 커다란 가방. 진중권 교수의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화가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로 시작된 수업은, 그의 정치적인 발언을 기다리는 수많은 카메라와 기자들의 기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제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노래’라는 페터 한트케의 시를 독일어로 낭송하며, 중앙대에서의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조금은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그는 매번 수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메고 강의실을 나섰다. 학기 중 수업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난 학기 초, 나는 TV 토론에서나 보던 유명 논객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로 들떠있었다. 하지만 첫 시간부터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처음 들어보는 학자들의 이름을 늘어놓는 모습에 그간의 기대가 약간 무너지는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기대 반 의심 반으로 듣게 된 수업은,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수업 중 하나로 남았다. 어디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매체 이론에 대해, 한 학기 동안 차고 넘치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를 대변하는 한 지식인과 함께 호흡할 수 있었다는 경험만큼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물론, 퉁퉁 부은 눈을 한 채 전날 100분 토론에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강의실에 들어서는 모습은 조금 실망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수업을 더 이상 이곳에서 들을 수 없다. 한산한 금요일,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다니던 ‘없어 보이는’ 모습도 볼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많은 학우들이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의 마지막 수업을 찾았다. 그곳에는 아직 그의 수업을 들어보지 못한 09학번 새내기들도 눈에 띄었다. 우리는 진중권이라는 교수를 지켜내지 못했고, 후배들이 들을 수 있었던 우리의 수업을 지켜내지 못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라고 말하는 재단,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리모델링’하겠다는 학교 본부. 아마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수업도, 권리도, 표현의 자유도. 진중권 교수는 마지막 수업에서 “판단은 어렵고 시간은 흘러간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인용했다. 그가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이유, 지식인이 아닌 논객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주저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 잃어 갈 것이다. 현실에 얽매여 이 순간을 놓친다면, 아무 것도 지킬 수 없다.



잘못된 것 일체를 시대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을 발하는 존엄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 이바라기 노리코












 

2009/09/22 20:23 2009/09/22 20:23
REPLY AND TRACKBACK RSS http://ddan.new21.org/tc/climbknot/rss/response/157
REPLY AND TRACKBACK ATOM http://ddan.new21.org/tc/climbknot/atom/response/157
TRACKBACK ADDRESS
http://ddan.new21.org/tc/climbknot/trackback/157
REPLY RSS http://ddan.new21.org/tc/climbknot/rss/comment/157
REPLY ATOM http://ddan.new21.org/tc/climbknot/atom/comment/157
이름 :
비밀번호 :
홈사이트 :
비밀글 :
*1  ... *18  *19  *20  *21  *22  *23  *24  *25  *26  ... *136 
count total 29422, today 9, yesterday 5
rss
Category
갑을고시원체류기
성탄특선
바람의집
오후만있던일요일
달력
«   2010/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